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사 이사금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《[[삼국사기]]》에서는 제3대 [[유리 이사금]]의 둘째 아들 혹은 《삼국사기》의 [[주석(언어)|주석]]에 유리 이사금의 동생인 나로(柰老)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. [[왕비]]는 허루(許婁) [[갈문왕]]의 딸인 사성부인(史省夫人) 김씨이다. 《삼국유사》에서는 사초부인(史肖夫人)이라고 했는데 자형이 비슷해서 둘 중 하나가 다른 쪽으로 와전된 것이 확실시된다. 앞서 유리 이사금은 유언으로 자신의 두 아들보다도 [[남해 차차웅]](제2대)의 [[사위]]이자 자신에게는 매제가 되는 [[탈해 이사금|석탈해]]가 재능이 있다고 해서 [[왕위]]는 일단 [[탈해 이사금]](제4대)에게 돌아갔다. 그러나 탈해는 석씨라도 일단 박씨의 사위로서 즉위한 것이기 때문에[* 왕의 성씨가 바뀌는 다른 사례인 후대의 [[미추 이사금]](제13대) 김미추, [[신덕왕]](제53대) 박경휘도 일단 사위로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.] 탈해 다음은 다시 원래대로 박씨가 즉위할 차례여서 유리 이사금의 [[장남]] 일성(逸聖)이 즉위하게 되어 있었으나 《삼국사기》에 >"어떤 이가 말하기를 '일성이 비록 적자이기는 하지만 위엄과 총명이 파사에 미치지 못한다'라고 하여 마침내 [[차남]] 파사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" 라고 언급되어 있는 걸로 보아[* 이 때문에 일성과 파사가 이복형제였다는 설이 있다. 그래서 유리 이사금에게 다른 왕비나 [[후궁]]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정사에 일성과 파사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등의 이유로 [[역사학]]계에서는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 않는다.] '''파사와 일성 사이에 [[권력]] 다툼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'''. 결국 일성은 먼 훗날에 제7대 국왕 [[일성 이사금]]이 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《[[일본서기]]》 등에 언급되는 신라의 [[천일창]] 왕자가 일성 이사금이 아닌가 하는 설이 있다. 또한 파사 이사금 부인의 성씨로 [[김씨]]가 처음 등장하는데 이는 '''당시 [[김알지]]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암시한다'''. 파사 이사금의 정치력에 대한 《삼국사기》의 기록을 보면 서기 81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시조묘([[나정]])에 [[제사]]를 지낸 뒤 국내를 순행하며 백성을 구제하고, [[사형]]수가 아닌 죄수들은 모두 용서해주는 대대적인 사면을 실행했다. 82년 각지의 [[관리]]들에게 [[농사]]와 양잠[* [[누에]]를 길러 [[비단]]을 생산하는 일]을 장려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라는 명을 내렸다. 87년 재차 성과 보루를 수비해 백제와 가야의 침공에 대비하고, 가소성(加召城)과 마두성(馬頭城)을 새로 지었는데 이 기록은 경주 지역을 벗어난 첫 축성 기록이다. 90년 10인을 파견해 주군의 관리를 감독하게 하고, 93년 고소부리군(古所夫里郡)에 직접 행차하여 나이많은 백성을 위문하며 [[곡식]]을 주었다고 전해진다. 이는 노동력 확충을 통해 [[농업]] 생산력을 증강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 증강을 꾀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파사 이사금은 군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다. 85년 [[백제]]의 침입과 94년 [[가야]]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. 그러나 신라의 세력은 고대 [[국가]]라고 하기에는 모자라 84년 고타야국의 [[조공]] 기록이 남아 있는데 [[세금]]이 아니라 조공이라는 점에서 주변의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는 뜻이다. 그래도 주변 국가들 중에서는 나름 강했던지 96년 가야가 침입해왔을 때는 오히려 [[역관광]]시켜 97년 화친을 받아냈다. 이후 지역 맹주로서 각국의 분쟁 해결을 주선하거나 말 안 듣는 국가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인다. 여기서 [[김해]] [[금관국]]의 [[수로왕]]이 나온다. [[음즙벌국]](지금의 [[경상북도]] [[경주시]] [[안강읍]])과 [[실직국]](지금의 [[강원도]] [[삼척시]]) 사이에 영토 분쟁이 일어났는데 두 나라는 먼저 파사 이사금에게 와서 [[중재]]해 달라고 청했지만 일단 파사 이사금은 나이가 많고 지식도 많은 김해 수로왕에게 묻자고 떠넘겼다. 파사 이사금의 요청을 받은 수로왕은 [[신라]] [[서라벌]]에 방문하여, 파사 이사금이 맡은 영토 문제를 대신 지혜롭게 해결해 음즙벌국의 손을 들어줬다고 한다. 그러나 이후 열린 연회에서 신라 6부 중 한기부의 대접이 시원치 않았다. 신라 6부의 다른 부는 [[이찬]][* 당시 신라 최고위 관등. 파사 이사금 대에는 [[이벌찬]]이 없었다.]([[장관]]급)으로 수로왕에 대한 [[의전]]을 행했는데, 한기부는 수로왕을 하찮게 보고, 낮은 등급의 인사를 의전이랍시고 보냈기 때문이다. 이건 '''[[신라]]가 맞을 짓 한 거다'''. 파사 이사금이 [[수로왕]]한테 분쟁 해결을 떠밀고 신라로 초청했으면 외국 [[국왕]]에 걸맞는 [[의전]] 대우를 해야 했다. 쉽게 말해 옆나라 [[대통령]]이 분쟁 해결을 위해 한 나라에 방문했는데 방문한 나라에서 만찬장에 각 부 [[장관]]급이 아닌 5급 [[사무관]]을 의전이랍시고 들이밀면 회담장이 개판 나지 않겠는가?[* [[독소 불가침조약]] 때 [[모스크바]]를 방문한 [[요아힘 폰 리벤트로프]]는 장관급이었는데, 소련 최고 권력자인 [[이오시프 스탈린|스탈린]]이 직접 맞았다. 파사 이사금 입장에서, 국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외국 국왕을 초청했으면 의전 대접은 나쁘지 않게 했어야 했다.] 한기부의 대우에 열이 받은 수로왕은 [[자객]]을 보내 한기부의 우두머리를 죽였는데 자객이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음즙벌국에 숨었고, 군주인 타추간(陀鄒干)이 자객을 보호했다. 이에 파사 이사금이 102년 음즙벌국에 침공해 타추간이 항복했고, 신라의 실력 행사에 겁을 먹은 [[삼척시]](혹은 [[울진군]], [[태백시]], [[동해시]])의 실직국과 [[경산시]]의 [[압독국]]이 잇따라 항복했다. 이 기록에 따르면 정작 주범인 금관국은 아직 공격하지 못하고, 화풀이나 했다고 볼 수 있다. 따지고 보면 신라도 금관국을 치기에는 명분이 쫄렸는데, '''먼저 수로왕을 경주로 초청한게 파사 이사금 본인'''이었기 때문이다. 외국 국왕이 방문한다 그러면 파사 이사금이 신하들에게 명령해서 적절한 [[의전]] 조치를 했어야 하지만 파사 이사금은 의전 대접에 실패한 책임이 있었기에 수로왕을 공격하지 못한 것이다. 이때 그냥 항복한 실직국과 압독국은 완전하게 병합된 건 아니고 그냥 신라에 종속된 명목상의 [[속국]] 정도로만 된 듯하며 싸워보지도 않고 허무하게 항복한 게 못내 아쉬웠는지 나중에 각자 신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다. 그러나 둘 다 참패했고 주민들은 모두 경주에 가까운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어 [[멸망]]했다. 6년 뒤에는 경상북도 내륙으로 진출해 [[다벌국]]([[대구광역시]]), [[비지국]]([[창녕군]]), [[초팔국]]([[합천군]])까지 공격해 병합했다. 북으로는 [[반파국]](후의 [[반파국|대가야]]), 남으로는 [[안라국]](후의 [[안라국|아라가야]]) 등이 있는 요충지인 이 지역은 이후 신라가 가야 계열 국가들과의 본격적인 힘싸움을 위해 교두보로써 점령한 듯하다. 105년 백제와 화친하고 106년 가야를 공격하여 큰 [[승리]]를 거두었다. 아들로 [[지마 이사금]]이 있다. 《삼국사기》 <[[박제상]] 열전>에 따르면 [[아도 갈문왕]]이 파사 이사금의 3세손([[손자]])이라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